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셀레우코스 제국 (문단 편집) === [[셀레우코스 4세]], [[안티오코스 4세]]: 수습기 === [[파일:터키 셀레우코스 1.jpg|width=800]] [[로마 공화국]]에게 크게 패배하고 아파메아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 기원전 187년 7월 3일 [[안티오코스 3세]]가 암살된 뒤 황위에 오른 [[셀레우코스 4세]]는 로마에게 갚을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실시해야 했고, 동생 [[안티오코스 4세]]를 국내로 돌아오게 하는 대신 아들 데메트리오스(훗날의 [[데메트리오스 1세]])를 로마에 인질로 보냈다. 또한 기원전 185년 아카이아 동맹에 사절을 파견해 부왕의 통치기간 동안 발효된 우호 조약을 갱신하였다.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2세가 폰토스와 전쟁을 벌이자, 그는 폰토스를 돕기 위해 상당한 동맹을 소집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타우루스 산맥의 횡단을 적대행위로 해석할 것을 우려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 하지만 그는 로마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페르세우스(마케도니아)|페르세우스]]와의 동맹 맺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딸 라오디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마카베오기]]>에 따르면, 셀레우코스 4세는 헬리오도로스를 예루살렘에 세금 징수 임무로 파견했다. 헬리오도로스는 예루살렘 제2신전의 금고를 털려고 했지만, 천사들에게 격퇴되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로마에 내야 할 배상금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던 그가 이교 신전을 대거 털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기원전 175년 9월 3일, 셀레우코스 4세는 그의 주요 관료 중 한 명인 헬리오도로스에게 암살당했다. 동기가 무엇인지는 기록되지 않았는데, 권력을 탐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셀레우코스 4세의 막내 아들 안티오코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섭정을 자처했으나 몇달 만에 페르가몬의 지원을 받은 [[안티오코스 4세]]에게 처단되었다. 어린 조카 안티오코스는 왕좌에서 밀려나 은신처에 연금되었고, 기원전 170년 또는 169년에 사망했다. 현대 학자들은 안티오코스 4세가 왕권을 다지기 위해 잠재적인 경쟁자인 조카를 살해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안티오코스 4세는 사치스럽고 관대한 통치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안티오키아 거리에서 서민들에게 돈을 뿌리고, 면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뜻밖의 선물을 주었으며,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과 델로스 섬의 제단에 돈을 기부했다. 또한 안티오키아 교외의 다프네에서 최고의 향신료와 천을 사용하여 귀족들과 함께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다. 이렇게 해서 귀족과 백성들의 지지를 끌어모으고 명성을 쌓던 중,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후견인들이 지난날 안티오코스 3세가 정복한 코엘레 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의 소유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양국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굳이 개입하고 싶지 않아 어느 쪽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기원전 173년,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 공화국이 안티오코스 3세에게 부과한 전쟁 배상금을 전액 지불했으며, 로마와 우호 관계를 다지고자 동맹 협약을 새로 체결했다. 이후 이집트 공략에 착수하기로 결심하고, 기원전 170년 펠루시움 전투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펠루시움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이집트 본토로 진격해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모든 지방을 공략했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체포했다. 하지만 로마 공화국의 개입이 두려워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멤피스에서 꼭두각시 파라오로서 계속 통치하게 한 뒤 귀환했다. 그가 철군하자 알렉산드리아 시는 새로운 파라오로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선출했다. 두 사람은 갈등을 벌였지만, 로마의 중재에 따라 내전을 치르는 대신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했다. 기원전 169년 겨울, [[마케도니아 왕국]]의 [[페르세우스(마케도니아)|페르세우스]] 왕이 안티오코스 4세에게 자신과 연합하여 로마에 맞서 싸우자고 주장했지만 거절했다. 기원전 168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로마에 지원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함대를 키프로스로 보내 이집트 함대를 격파하고 키프로스를 수중에 넣었다. 이후 육군을 친히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하여 펠루시움을 추가로 공략하고, 하이집트를 점령하며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진을 쳤다. 이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멸망하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집트를 석권하는 듯했다. 그러나 기원전 168년 6월 22일 [[피드나 전투]]에서 페르세우스의 마케도니아군을 섬멸하고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을 멸망시킨 로마가 개입했다. 로마 사절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안티오코스 4세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경고했다. 안티오코스 4세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왕 주위에 원을 그리고, 안티오코스 4세에게 대답을 하기 전에는 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지난날 로마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로마가 얼마나 강한지 파악했기에,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대신, 셀레우코스 제국이 남부 시리아를 계속 영유하는 건 인정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를 지속적으로 공략하는 동시에 그리스 도시들을 건설하고 육성하여 내실을 다지고자 노력하였다. 시리아 오론테스 강변의 에피파니아 시를 확장하여 수도교, 공의회당, 시장, 그리고 주피터 카피톨리누스 신전을 세웠다. 또한 또 다른 에피파니아 시를 아르메니아에 세웠으며, 페르시아 만에 안티오키아 조폐국을 세워 인도와 메소포타미아 강 하구의 지역 사이의 바닷길을 따라 무역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 외에도 여러 도시가 세워졌는데, 이 도시들은 각자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한편, 안티오코스 4세는 제국 통합을 이루기 위해 제국의 국교인 그리스 종교를 전 신민이 따르게 하고자 노력했다. 제국 곳곳에 신전을 설치했고, 토착민들에게 기존에 믿던 신 대신 [[제우스]]를 섬기라고 권고했다. 이러한 정책은 곳곳에서 파열을 일으켰는데, 특히 [[유대]]에서의 반발이 심했다. 당시 [[유대교]]는 전통을 지키려는 하시아파와 [[헬레니즘]]을 선호하는 개혁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개혁파를 지원하였고, 이아손을 [[대제사장]]으로 선임하여 예루살렘에 체육관을 짓고 젊은이들에게 그리스 문명을 가르치는 걸 허락했다. 기원전 172년, 그는 모종의 이유로 이아손 대신 메넬라오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로 쳐들어갔을 때, 이아손이 반란을 일으켜 성채를 제외한 예루살렘 전역을 정복하고 메넬라오스의 많은 추종자를 학살했다.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전 유대 대제사장 이아손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의 특권을 박탈한 후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후 제우스 신전을 예루살렘에 세우도록 했고, 자신의 모습을 담은 동상을 세우고 그 발 아래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러자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하시아파가 반란을 일으켰고, 조기 진압에 실패해 [[마카베오 전쟁]]으로 커지면서 제국의 국력을 상당히 갉아먹었다. 이 마카베오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왕조는 수만 명의 대군을 투입했으나 유대인들의 결사적인 저항에 부딪쳐 계속 고전하는 통에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다. 기원전 167년 파르티아 왕 [[미트리다테스 1세]]가 헤라트를 점령하여 인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동방으로 출진해 [[파르티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상당한 영토를 되찾았고, 아르메니아가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원정을 지속하던 기원전 164년 11월 또는 12월 페르시아에서 나나야 신전을 약탈하게 한 직후 병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